파리 생제르맹 FC

 






[image]
'''파리 생제르맹 FC'''
'''Paris Saint-Germain F.C.'''
'''정식 명칭'''
<colcolor=black>Paris Saint-Germain Football Club[1]
'''애칭'''
'''PSG''' (피에스지)
Les Parisiens (파리지앵)
Les Rouge et Bleu (빨강과 파랑)
'''창단'''
1970년 8월 12일[2]
'''소속 리그'''
리그 1 (Ligue 1)
'''연고지'''
일드프랑스 레지옹 파리 (Paris)
'''홈구장'''
파르크 데 프랭스 (Parc des Princes)
(47,929명 수용)[3][4]
'''라이벌'''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 르 클라시크'''
'''구단주'''
[image] 타밈 빈 하마드 알사니 (Sheikh Tamim bin Hamad Al-Thani)[5]
'''회장'''
[image] 나세르 알 켈라이피 (Nasser Al-Khelaïfi)
'''단장'''
[image] 레오나르두 아라우주 (Leonardo Araújo)
'''감독'''
[image]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Mauricio Pochettino)
'''주장'''
[image] 마르퀴뇨스 (Marquinhos)
'''부주장'''
[image] 프레스넬 킴펨베 (Presnel Kimpembe)
'''공식 웹 사이트 및 소셜 미디어'''

'''한국 팬 사이트'''

'''우승 기록 '''
'''리그 1 (1부)'''
(9회)
1985-86, 1993-94, 2012-13, 2013-14, 2014-15, 2015-16, 2017-18, 2018-19, 2019-20
'''리그 2 (2부)'''
(1회)
1970-71
'''쿠프 드 프랑스'''
(13회 / 최다 우승)
1981-82, 1982-83, 1992-93, 1994-95, 1997-98, 2003-04, 2005-06, 2009-10, 2014-15, 2015-16, 2016-17, 2017-18, 2019-20
'''쿠프 드 라 리그'''
(9회 / 최다 우승)
1994-95, 1997-98, 2007-08, 2013-14, 2014-15, 2015-16, 2016-17, 2017-18, 2019-20
'''트로페 데 샹피옹'''
(10회 / 최다 우승)
1995, 1998, 2013, 2014, 2015, 2016, 2017, 2018, 2019, 2020
'''UEFA 컵 위너스컵'''
(1회)
1995-96
'''UEFA 인터토토 컵'''
(1회)
2001
'''클럽 기록'''
'''통산 최다 출장'''
[image] 장마르크 필로제 (Jean-Marc Pilorget) - 435경기[6] (1975-1989)
'''통산 최다 득점'''
[image] 에딘손 카바니 (Edinson Cavani) - 200골 (2013-2020)
'''최고 이적료 영입'''
[image] 네이마르 주니오르 (Neymar Júnior)
(2017년, From FC 바르셀로나, 2억 2,200만 €)
'''최고 이적료 방출'''
[image] 곤살루 게드스(Goncalo Guedes)
(2018년, To 발렌시아 CF, 5,700만 €)[7]
'''리그 1''' '''득점왕'''
1977-78 - [image] 카를로스 비안치 - 38경기 37득점
1978-79 - [image] 카를로스 비안치 - 36경기 27득점
2005-06 - [image] 파울레타 - 36경기 21득점
2006-07 - [image] 파울레타 - 33경기 15득점
2011-12 - [image] 네네 - 35경기 21득점
2012-13 - [image]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 34경기 30득점
2013-14 - [image]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 33경기 26득점
2015-16 - [image]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 31경기 38득점
2016-17 - [image] 에딘손 카바니 - 36경기 35득점
2017-18 - [image] 에딘손 카바니 - 32경기 28득점
2018-19 - [image] 킬리안 음바페 - 29경기 33득점
2019-20 - [image] 킬리안 음바페 - 20경기 18득점
1. 개요
2. 역사
2.1. 1980년대 이전
2.2. 1990년대
2.3. 2000년대
2.4. 2010년대, 무한의 오일 머니
2.5. 2020년대
3. 재정사 및 스폰서쉽
3.1. 현재 스폰서
3.1.1. 탑 스폰서
3.1.2. 프리미엄 파트너
3.1.3. 오피셜 파트너
3.1.4. 오피셜 서플라이어스
3.1.5. 지역 파트너
3.2. 역대 스폰서
4. 선수단
4.1. 주요 출신 선수
6. 응원가 : Allez Paris Saint-Germain
7. 역대 성적
8. 역대 감독 및 통계
9. 역대 엠블럼
10. 역대 유니폼
11. 라이벌리
11.2. 파리 더비?
12. 여담
1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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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Allez Paris, Paris est magique!" (나가자 파리, 마법과도 같은 파리여!)'''

— 파리 생제르맹의 팀 구호

프랑스 리그 1의 프로 축구 클럽. 연고지는 파리. 홈 구장은 파르크 데 프랭스.
쿠프 드 프랑스, 쿠프 드 라 리그, 트로페 데 샹피옹 최다 우승을 기록하고 있으며, 도합 '''44개'''의 프랑스 축구 역사상 가장 많은 타이틀 및 FFF의 유일한 UEFA 위너스컵 챔피언 등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프랑스 최대 규모의 빅클럽이자 대표적인 명문클럽이다. 또한 마르세유와 더불어 프랑스에서 UEFA 주관 국제 대회를 우승한 클럽이기도 하다[8]. 애칭으론 페에스제(PSG), 파리지앵(Les Parisiens), 빨강과 파랑(Les Rouge et Bleu)이 있다.
1970년 8월 12일, 파리 FC와 스타드 생제르맹(Stade Saint-Germain)이 병합하여 창단되었다.[9] 유럽 내 유수의 클럽들에 비해 상당히 늦게 창단되었지만, 프랑스의 수도가 연고지라는 든든한 배경을 가진 파리 생제르맹은 창단 후 파리 시민들의 열렬한 응원에 힘입어 곧바로 2부 리그 우승을 차지하여 승격하고, 1978년에 취임한 프란시스 보렐리 회장에 의해 팀은 빠르게 성장하여 루이스 페르난데스, 도미니크 바라텔리, 도미니크 로슈토 등을 축으로 1981-82 시즌에 팀을 쿠프 드 프랑스 결승에서 처음으로 우승컵을 거머쥐게 된다.
1974년 이후부터 한 번도 강등을 겪지 않고 리그 1에 잔류하고 있으며, 특히 1991년부터 카날 플뤼스(CANAL+)[10]가 인수하면서 1990년대 내내 전성기를 누렸고, 2011년 카타르 국왕이 구단주가 되면서부터는 막대한 자본력을 통해 프랑스를 대표하는 클럽으로 자리잡았다.[11][12]
2012년 기준 라이벌인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를 이어 프랑스에서 2위 규모의 서포터를 가지고 있었고, 2011-12 시즌 기준 파르크 데 프랭스의 평균 관중 수는 42,892명으로 리그 1 최다였다. 2016-2017 시즌 기준으로도 43,000 ~ 45,000명이 꾸준히 모인다. 참고로 PSG보다 2만명 가량을 더 수용할 수 있는 홈구장을 가진 마르세유는 평균 약 37,000명이었다.
PSG의 팬으로 알려진 유명인은 장폴 벨몽도, 토니 파커, 니콜라 사르코지 등.
1970년대 이후 자국과 유럽에서 이름을 날렸고, 눈부신 발전을 이루면서 일부 중흥기를 거치는 등 유럽 명문 팀 반열에 서서히 이름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카타르 자본 유입과 10년간 프랑스를 말그대로 '''지배'''하고 2019~2020 챔피언스 리그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이젠 유럽 최정상 클럽의 아성에도 도전하는 손에 꼽히는 강팀이자 빅클럽이 되었다.

2. 역사



2.1. 1980년대 이전


1960년대 후반, 당시 파리를 연고지로 둔 축구 클럽은 1896년에 창단된 'Racing Club de France'라는 종합 스포츠클럽[13](산하 프로축구 구단만을 칭할 땐 프랑스어 발음으로 '라싱 파리'라 불렸다.)과 레드 스타 FC, 스타드 프랑스 등이 있었다.
그런데 '라싱 파리'가 1969년 리그를 탈퇴하며 프로축구 부문에서 완전 철수를 계획하고, 다른 클럽들도 강등이나 클럽 해체를 이유로 파리가 연고지인 1부 리그 소속 클럽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이때를 틈타 수도 파리에 '빅클럽'을 만들려는 목적으로 파리 FC가 창단되었고, 다음 해인 1970년, 스타드 생제르맹과 파리 FC가 병합을 발표하고 약 2만 명의 서명을 얻어 탄생한 것이 바로 파리 생제르맹 FC의 탄생이다. 창단 당시에는 장폴 벨몽도 등 파리 출신의 유명인들과 기업들이 자금 지원과 많은 응원을 보내왔지만, 출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우선 전신 클럽이 파리가 연고지였고, 파리 FC와 병합을 함에도 PSG의 연고지는 파리가 아니었다. 바로 지금의 파리 외곽인 생 제르맹 앙 레[14]를 연고지로 한 것. 당시 파리 시와 15km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때문에 또다시 1부 리그 소속 클럽이 없어진 파리 시는 PSG에 대한 기업들의 자금 원조를 막았으며, 결국 1970-71 시즌 2부 리그 우승으로 1부 리그에 속할 예정이었던 PSG는 아마추어 클럽(당시 프랑스 3부 리그인 디비시옹3에 소속되었다.)으로 이름을 유지한 채 떨어져나왔고, 파리 FC는 예정대로 리그 1에 남아 2개의 클럽으로 다시 나뉘어졌다.
3부 리그에 소속되었으나, 파리 시민 2만여 명의 서명까지 받으며 창단되었다고 상술했듯이 '''파리지앵들의 선택을 받은 건 파리 FC가 아니라 이미 PSG였다.'''## PSG는 파리의 사교계 유명인들까지 등에 업고 급성장 하였으며, 1973-74 시즌 이후에 다시 리그 1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정작 그 해 리그 1에 남았던 파리 FC는 2부로 강등되었다. 파리 FC가 강등당하면서 1974년까지 홈구장으로 사용하던 파르크 데 프랭스는 PSG의 홈구장이 되었다.
1970년대 후반 PSG는 생 제르맹 앙 레가 파리에 속하게 되며 이제 파리에게 미움받을 이유조차 없어졌고, 1970년대 말까지 리그 1에서 버티며 클럽의 토대를 닦았다.
대한민국 국내에선 PSG도 강등당한 적이 있다며, 상술한 1972-73 시즌의 디비시옹 3 소속을 근거로 꼽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강등(Relegate)'이 아닌 '재소속(Restart)'의 개념으로 보고 있으며, '''공식적으로 창단 이후 한 번도 강등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Which European football clubs have never been relegated? :: 더 가디언, 단 한 번도 강등당하지 않은 유럽의 축구 클럽들은?
A brief history of PSG :: ESPN, 간단한 PSG 역사
한편 파리 FC는 강등 이후 리그 1 강등권과 리그 2에서 전전하다가 1983년, 전술한 '라싱 파리'와 병합/분할되어 프랑스 4부 리그까지 강등당한다. 분할된 팀 중 하나는 5부까지 강등되었다. 2019-2020 시즌 기준, 파리 FC는 현재 2부 리그 2 소속이다. 근데 승강팀이고 작년까지만 해도 프랑스 3부 리그 샹피오나 나시오날에 속했었다.
PSG는 1981-82 시즌 쿠프 드 프랑스에서 우승을 차지하여, 우여곡절 끝에 클럽 역사상 최초의 주요대회[15] 우승을 하게된다. 1982-83 시즌에도 대회 2연패 달성.
1985-86 시즌에는 제라르 울리에 감독이 취임하고 AJ 오세르로부터 조엘 바츠를 영입하여 창단 16년 만에 팀 역사상 최초로 리그 1 우승을 달성하기도 했다.[16] 그리고 '''90년대가 되자 파리의 본격적인 첫번째 전성기가 시작된다.'''

2.2. 1990년대


1991년 5월에 카날+ 방송사가 클럽을 인수한 뒤, 공격적인 투자로 강팀이 되어 1992-93 시즌 UEFA 컵과 1993-94 시즌 UEFA 컵 위너스 컵에서 '''레알 마드리드 CF'''를 잡고 준결승까지 진출하는 이변을 일으킨다.
특히 1994년에 파리는 통산 두 번째 리그 1 우승을 달성하였는데, 파리의 최대 라이벌인 마르세유는 전 시즌에 벌인 승부 조작을 들키게 되고, 파리에 밀려 우승을 놓친것도 서러울 지경인데 전 시즌 리그 1 우승 타이틀 박탈이라는 중징계와 함께 강등을 당하게 되어서 파리 입장에선 겹경사를 치렀다.
그렇게 리그에서 걸리적거리던 라이벌을 제거한 파리는 대망의 1994-95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다시 모습을 보이게 되었고, 조지 웨아 ,히카르두 고메스, 하이 , 다비 지놀라, 폴 르갱, 앙투안 콩부아레, 뱅상 게랑, 다니엘 브라보, 베르나르 라마 등등 주축 선수들이 뛰어난 호흡을 보여주며 PSG는 8년 전 첫 출전 때와는 180도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조별 리그에서 같은 조였던 '''FC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홈, 원정 안 가리고 모두 이겼고, 뮌헨전 2승을 포함하여 러시아의 강호 FC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우크라이나의 강호 FC 디나모 키예프를 상대로도 2승씩 거두며 도합 6전 전승이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8강에 진출, '''FC 바르셀로나'''까지 쓸어버리며 팀 역사상 최초로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진출이라는 업적을 달성하였다. 현재에 들어 레바뮌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낼정도로 유럽의 삼대장이라 불릴만한 팀들이 90년대엔 모두 파리에게 스윕당했다는점이 흥미롭다.
준결승전에선 밀란에게 완패를 당했지만, UEFA 컵, 컵 위너스 컵, 챔피언스 리그에서 연속으로 준결승 진출이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1996, 1997년에는 2연속 컵 위너스 컵 결승 진출에 힘입어[17] UEFA 공인 클럽 랭킹 1위를 차지했다.[18]
그러나 1998년에 미셀 데니소트 회장이 떠난 뒤 팀은 ​재정과 성적면에서 하락세로 접어드는 국면을 맞이했다. 이에 따라 팀을 주름잡던 스타 선수들은 하나둘씩 떠났고, 빚은 122억 유로로 뛰어올랐다.[19]

2.3. 2000년대


2000년대 내내 쿠프 드 프랑스에선 세 번이나 우승컵을 들어 올렸지만, 정작 리그에서는 이름값에 걸맞는 포스를 보이지 못했다.
2000-01 시즌에 레알 마드리드에서 니콜라 아넬카가 이적, 2001년에는 브라질 클럽으로부터 호나우지뉴를 영입한다. 호나우지뉴는 2003년까지 팀에 있었는데 주요 출신 선수 부분에 후술된 바와 같이 각종 문제로 3000만 유로라는 생각보다 싼 값에 FC 바르셀로나로 가게 된다.
호나우지뉴가 떠난 2003년, 1200만 유로로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이전의 PSG 최고의 공격수였다고 회자되는 파울레타를 영입한다. 파울레타는 2008년까지 다른 클럽의 러브콜에도 PSG에 남아 리그 1 득점왕 2회를 차지하며 좋은 활약을 해준다. 물론 그의 마지막 시즌인 2008년엔 16위[20]로 강등권을 아슬아슬하게 탈출하는 등 좋지 않았지만, PSG에게 좋은 추억이 많은 대회인 쿠프 드 프랑스 2회 우승, 쿠프 드 라 리그 1회 우승을 달성하였다. PSG의 클럽 통산 100득점 또한 파울레타가 달성하였다.
한편 파울레타의 활약에도 불구, 망하기 직전 같던 구단 재정은 카날+가 2006년에 2600만 유로라는 싼 값으로 콜로니 캐피털(부동산 투자회사), 버틀러 캐피털 파트너스(개인투자회사), 모건 스탠리에 주식을 매각하면서 해결했다.
이후 카날+가 손을 뗀 뒤 PSG는 심각한 재정난을 맞이하였다. 하지만 같은 해 에미레이트 항공이 메인 스폰서가 되었고, 파울레타가 떠나는 2008년에 스폰서 계약을 2014년까지 갱신하였다.
에이스는 가고 구단주는 공석에 스폰서는 새로 구하는 등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지난 시즌 16위라는 성적표를 들고 2008-09 시즌을 맞이한 PSG는 리그 초중반까지는 우승경쟁을 했지만 6위로 시즌을 마감하며 챔스 진출권도 놓치며 아쉬운 마무리를 하였다. 그래도 강등 걱정 안 한 게 위안이라면 위안. 이때쯤 카날+가 주식을 매각했던 회사 중 하나인 콜로니 캐피털이 모건스탠리로부터 PSG 주식 보유분의 95%를 구입하며 구단주가 되었다.
2009-10 시즌엔 또 쿠프 드 프랑스에서 8번째 우승을 차지하게 되는데, 이 시즌의 FA컵 우승은 PSG의 여자축구단인 PSG 페미닌도 동시에 이룬 것이라 의미가 크다. 동일 클럽의 남녀팀이 쿠프 드 프랑스를 동시에 석권한 것은 프랑스 최초였기 때문.
트로피는 몇 개 들었지만 리그 등 근 10년간 그저 그런 성적을 낸 팀은 2010-11 시즌을 기점으로 반등에 성공했다. 클로드 마켈렐레그레고리 쿠페, 루도빅 지울리 같은 노장 선수들을 참 잘 활용하면서 마마두 사코, 클레망 샹톰과 같은 재능 있는 유스 출신 선수들도 동시에 1군으로 올라와서 주전 확보를 하였으며, 특히 AS 모나코에서 이적해 온 안데르손 네네의 사기적인 활약이 부흥에 큰 도움을 주었다. 실제로 10-11 시즌 네네가 윙어 자리에서 엄청난 활약을 뽐내던 전반기의 PSG는 거의 우승 후보 1순위급 경기력을 선보였다. 다만 스쿼드 뎁스가 얇은 관계로 후반기에 들어 거의 전 경기 풀타임을 뛰던 네네의 과부하로 인하여 팀 전체의 경기력도 현저히 감소하여 끝내 4위로 추락했다.

2.4. 2010년대, 무한의 오일 머니


2011년 5월, 타밈 빈 하마드 알사니가 카타르 투자청(QIA)의 자회사인 카타르 스포츠 인베스트먼트(QSI)를 통해 돈을 투자하여 전 구단주인 미국 콜로니 캐피탈로부터 PSG 지분의 70%를 소유하고, '''대주주 겸 PSG의 구단주가 된다.'''
파리 생제르맹은 순식간에 엄청난 재력을 확보하였고[21], 실제로 그 재력을 유감없이 쏟아붓고 있다. 알 타니가 QSI를 통해 PSG에 투자할 수 있는 금액은 '''600억 달러'''에 달하는 규모로 밝혀져 EPL리얼부와 함께 쇼 미 더 머니를 현실에서 시전 가능한 구단이 되었다.
2012년엔 콜로니 캐피털과 버틀러 캐피털 파트너스로부터 남은 30%의 주식까지 완전히 구입, '''QSI가 단독주주가 되었다.''' 카타르의 타밈 황태자(2013년 6월 25일 이후 카타르 수장)의 친구인 나세르 알 켈라이피가 회장을 맡게 되었고, 동시에 수년간 1억 유로 이상의 금액을 팀 강화를 위해 이적시장에 쓰겠음을 시사했다.
2011-12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슈퍼 스타들을 영입하기 시작, 2012-13 시즌을 전후로 화려한 전력을 구성했다. 공격진에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에세키엘 라베찌, 제레미 메네즈, 하비에르 파스토레, 안데르손 네네, 중원에 제2의 피를로라 불리는 마르코 베라티, 이탈리아 국가 대표 중앙 미드필더 티아구 모타, 마티유 보드메, 블레즈 마튀이디, 모하메드 시소코, 그리고 수비진에 막스웰, '''치아구 시우바''', 알렉스, 크리스토프 잘레[22], 마마두 사코 등이 포진했다.
네임 밸류만 따지자면 어느 빅 리그에서든 우승에 도전해볼 수 있으며, 챔스도 4강 정도는 족히 노려볼 만한 수준으로 팀이 탈바꿈되었다. 다만 한꺼번에 폭풍 영입을 해댄지라 조직력이 바닥을 기었고, 그 때문에 한동안 공격은 즐라탄, 수비는 시리구가 다 하는 상황이 이어지기도 했다.
한때 레오나르두 단장이 레알 마드리드카카 영입에도 공을 들이고 있었지만, 카카가 끝내 마드리드에서 큰 활약을 보이기에는 어려울 것으로 점쳐질 뿐더러 주급도 어마어마한 수준인지라 결국 영입을 포기했다. 카카 본인도 마드리드를 떠난다면 다른 곳은 거의 생각치 않고 자신의 친정 클럽인 AC 밀란만을 원하는 상황이었다. [23]
한편, PSG는 인테르의 전 감독이자 세리에 짬밥이 꽤 있는 레오나르두 단장의 취향 때문인지 세리에 A 출신 선수들을 많이 노리는 편인데, 콰밥만훈 이후로 또 다른 대괄호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마우로 사라테,[24] 유벤투스아마우리,[25] 쩌리엘로란 별명을 가진 AS 로마마르코 보리엘로 영입을 노린다는 기사가 나오자, 세리에매니아 같은 세리에 관련 커뮤니티들에게 '잉여들을 수거해 주시는 레오님'으로서 찬양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다 옛말이 되었고, 현재 한국의 세리에 커뮤니티들의 일반적인 여론은 레오나르두와 PSG를 매우 싫어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AC 밀란의 에이스 센터백이자 현 유럽 최고의 센터백들 중 하나로 꼽히고 있는 치아구 시우바를 한화 620억에 달하는 거액에 영입해 갔고, AC 밀란을 먹여살렸던 '세리에 킹'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를 약 320억 가량에 영입해 갔으며, 나폴리의 그 유명한 '삼각 편대'의 일원인 에세키엘 라베시까지[26] 데려가면서 쩌리 수거자는커녕 에이스 수집자로서 세리에를 말려 죽이려 든다고 신나게 까는 중. 다만 PSG가 무슨 세리에에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며 그저 단장이 레오나르두에 감독이 안첼로티라서 세리에 위주로 선수를 수급했던 것뿐이다.










2.5. 2020년대




3. 재정사 및 스폰서쉽


스포츠구단에게 재정은 중요한 부분이고 PSG의 역사에선 더욱 그렇다. 역사 문단에도 상술해두었듯이 파리 생제르맹은 '''프랑스 수도빅클럽'''을 바라던 프랑스 축구인들과 파리 시민 약 2만 명의 서명을 얻어 창단되었는데, 창단 이후 3년 동안은 서명을 한 그 파리 시민 약 2만여 명을 '소시오(Socio)'로 두는 시민구단으로서 운영되어왔다.
다만 서명을 통한 시민구단으로서의 창단이 처음부터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주요 자금 출처였던 피에르테티엔 기요(이후 1대 회장), 가이 크레센트(이후 2대 회장), 앙리 파트렐(이후 3대 회장) 등으로 구성된 이사진들은 자금조달에 한계를 느꼈고, 이때 도움을 준 게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레알 마드리드 회장이었다.##
베르나베우는 파리 시내에 한한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시민구단으로서의 창단을 제시했고, 그렇게 실시된 창단(클럽 합병) 서명을 통해 파리 생제르맹 FC가 탄생하였다. 역사 문단에서 설명하는 합병된 클럽 중 '파리 FC'는 파리의 갑부 사업가들이 1969년 창단만 해놓고 사실상 방치하던 클럽이었으며[27], '스타드 생제르맹'은 상술한 '앙리 파트렐'이 당시 회장으로 있던 구단이었다. 그래서 합병에 대한 장애물은 사실상 자금이 가장 컸었는데 베르나베우가 아주 적절한 조언을 해준 것. 또한 그가 제시하여 이루어진 파리 시민들의 서명 및 구단에 대한 재정적 기여는 프랑스 축구 역사상 최초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렇게 창단된 파리는 3년의 시민구단 시절을 거치게 된다. 하지만 신생구단의 한계로 서명 등 거창하게 창단했지만 첫 시즌에 반짝 수익만 생겨났을 뿐 2, 3년차엔 상당한 적자를 보았다. 그래서 당시 3대 회장 앙리 파트렐은 지금의 파리 엠블럼 디자인을 있게 한 파리의 4대 회장, 디자이너 다니엘 에스떼에게 투자를 받고 회장직 또한 넘기게 된다. 다니엘 에스떼는 1974년부터 4년간 지금까지 내려오는 PSG 엠블럼, '에스떼 셔츠'로 불리는 유니폼 디자인과 자금 소방수 등의 여러가지 일들을 했으나, 홈구장 티켓 중복판매 혐의로 1978년 프랑스 축구 연맹으로부터 '''축구계에서 완전히 퇴출당하게 된다'''.[28]
에스떼의 사임으로 5대 회장은 다니엘 에스떼가 취임 시 부회장으로 임명한 프란시스 보렐리가 맡게 되었다. 보렐리의 임기 동안 쿠프 드 프랑스 2번, 구단 최초의 리그 1 우승까지 이뤄냈지만 임기 말 보렐리는 에스떼가 선녀로 보일 정도로 더 정신나간 놈이었다. PSG 수뇌부 장악을 위해 PSG 명의로 엄청난 부채를 만드는 것도 모자라 금융 비리까지 저질렀으며, 결국 전임 에스떼와 마찬가지로 이 모든 게 밝혀진 1991년 프랑스 축구 연맹으로부터 '''PSG 회장직에서 강제 사임당하게 된다'''.[29]
이후 카날+의 인수 및 이 시기 PSG 첫 전성기로 인해 이때의 재정이 부각되지 않았는데, 보렐리 사임 당시 PSG의 상태는 '''파산 직전이었다'''. 까놓고 말해서 카날+가 PSG를 구제해준 것과 마찬가지. '''프랑스 수도빅클럽'''을 바라던 창단 때 분위기처럼 카날+리그 1의 발전과 리그 경쟁력 확보를 위해 파리를 연고로 하는 PSG를 선택한 것이었고, 클럽이 가진 모든 부채를 처리해주었다.
마침 딱 좋은 시기였던 게 디지털 전환 전까지 프랑스 방송업계의 안정된 성장기(1990년대~2004년)에 방송사인 카날+가 구단주로 있었으니 금상첨화였다. 공영방송 4개, 민영방송 3개가 주파수 6개를 나눠쓰던 시절에 시장 선점으로 유료채널임에도 프랑스 1타 방송국이었던 게 카날+다. 스포츠 중계와 영화 방영으로 차별화를 하던 당시 카날+의 정책에 힘입어 이 시기 PSG의 재정 또한 프랑스 구단 중 최고 수준에 올라섰다. 괜히 파리의 전성기가 아니었던 셈.
그러나 1998년 미셀 데니소트 회장이 사임한 이후 파리의 재정은 다시 어려워진다. 2005년 경 디지털 전환기에 공영방송프랑스 텔레비지옹의 6개보다도 많은 7개의 채널을 확보하게 된 카날+ 자체의 사정도 원인 중 하나로 보는 편. 90년대 후반 프랑스 클럽 중 최고의 자금력을 자랑하던 PSG는 2004~2006년 3년 사이에 반대로 가장 많은 빚을 진 프랑스 클럽이 된다.
구단의 전성기를 함께한 선수들을 여기저기 팔아치우고, 카날+ 또한 여러 금융회사 등에 PSG 지분을 매각하며 롤러코스터라도 탄듯 90년대 후반에 비해 너무 암울한 2000년대 중후반을 보내게 된다. 카날+의 매각 이후 2008년부터 2년간 95%까지 지분을 끌어올린 콜로니 캐피털도 PSG를 축구 구단으로써 진지하게 키울 생각은 없었다. 생각만큼 수익이 안 나오자 2010년 콜로니 캐피털은 곧바로 매각처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1998년 카날+가 손을 떼기 시작하던 때부터, 2010년 이 당시까지 클럽 운영 누적 적자는 무려 3억 유로로 추정. 그야말로 20년 전 카날+보다 더 돈 많은 구세주가 필요했던 상황에 '''창단의 70년, 전성기의 90년대처럼 프랑스 수도의 클럽이라는 메리트를 높게 본''' 타밈 빈 하마드 알사니 당시 카타르 황태자가 2011년 PSG를 인수하게 된다.
다만 카타르의 이 투자는 '''파리빅클럽을 원하는 프랑스 축구인들의 그것과는 목적이 전혀 달랐다.'''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에 앞서 카타르라는 국가의 축구계에서의 이미지, 월드컵 자체의 홍보, 2019 AFC 아시안컵 아랍에미리트에서도 확인되었던 아랍에미리트와의 스포츠계 파워게임 등 복잡한 이해관계가 있었던 것. 애초에 구단 인수 6개월 전부터 비리 의혹은 있었다. 개최지 투표 직전 니콜라 사르코지 당시 프랑스 대통령과 카타르의 국왕, 총리가 회동을 가진 것부터 뭔가 냄새를 맡은 사람들이 존재했으니...
하지만 PSG라는 구단 입장에선 아무렴 어떠리, 역사 문단에 상술되었듯 600억 달러(당시 약 510억 유로) 상당의 투자가 가능해진 시점에서 3억 유로의 손실액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각잡고 돈을 풀기 시작했는데 카타르 자본 투입 전 클럽 레코드는 2000년 33m 유로의 니콜라 아넬카였으나, 이후 하비에르 파스토레 45m을 시작으로 43m 치아구 시우바, 19m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50m 다비드 루이스, 62m 앙헬 디마리아, 64m의 에딘손 카바니 이후 누구나 다 알고있는 180m, 222m의 미친듯한 영입을 보여주며 유럽의 유이한 국영 클럽으로서의 씀씀이를 보여주었다.
당연히 뒤탈이 없지는 않았고 2012년, 2017년 두 차례의 UEFA 조사와 UEFA FFP 룰 준수를 위해 킬리안 음바페, 네이마르 주니오르 영입 이후로는 이렇다할 빅 사이닝은 없었으며 클럽 가치는 폭발하듯 올랐어도 17-18 시즌 이후 2~3년 정도 순이익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 세기의 영입 이후 PSG는 유럽의 확실한 상위 클럽으로 사람들에게 각인되었고, PSG 프로젝트는 축구 클럽을 넘어 다른 수익창출 모델 또한 만들기 시작하였다.
사실 네이마르 영입 후 PSG의 재정관리 전략은 구단의 자체 수익만큼만 지출하는 것이라는 게 팬들 사이의 보편적인 인식이다. 카타르 자본은 PSG 프로젝트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작정 돈을 푼 적이 없기도 했고. 실제로 2019년엔 카타르 자본 인수 후 최초로 이적시장에서 흑자를 기록했다. 수익 110m, 지출 95m. 아무튼 2010년대 후반 들어서 다수의 디자이너를 영입하는 등 PSG의 의류계 브랜드화를 위한 노력은 지금도 진행 중이며, 그 외 시티 풋볼 아카데미의 프랑스판인 '파리 생제르맹 아카데미'나 부회장 장클로드 블랑이 맡은 파르크 데 프랭스 재개발 등 축구는 물론이고 축구 관련 분야, 또는 그 외의 영역에까지 PSG는 점점 자신들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카타르 자본 인수 후 PSG 재정'''
'''시즌'''
'''순이익'''(€)
'''총수입'''(€)
'''클럽 가치'''($)
'''참고'''
2011-12
- 5m
221m
-
##
2012-13
- 4m
399m
-
2013-14
- 0.3m
474m
415m
##
2014-15
11m
481m
634m
##
2015-16
10m
521m
814m
##
2016-17
- 19m
486m
841m
##
2017-18
32m
542m
971m
##
2018-19
27m
636m
1.092b
##
2019-20




2020-21





3.1. 현재 스폰서


PSG는 브랜드화를 통한 수익 창출, 보다 깔금한 재정 자립을 위해 스폰서들을 지불 금액에 따라 분류하고 있다. 최고 단계를 '탑 스폰서'로 분류하며, 아래로 '프리미엄 파트너', '오피셜 파트너', '오피셜 서플라이어스', '지역 파트너'(최저 단계)까지 총 5단계가 존재한다.
금액이나 기간은 프랑스 언론 등에서 공개된 부분만 기재하겠지만 정확한 금액으로 보긴 힘드니 참고용으로만 보는 걸 추천한다. 유니폼 마킹이나 명명권 등의 세부사항 또한 마찬가지. 또한 에어 조던 등, 이 공식 분류에 속하지 않게 계약을 맺은 스폰서도 존재한다. 때문에 공식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이 스폰서들이 PSG의 모든 스폰서는 아니다.

3.1.1. 탑 스폰서


[image]
'''PSG TOP SPONSORS'''
'''NIKE'''
'''ALL'''

[image]
  • ALL(아코르 그룹)
    • 금액 : 연 6,500만 유로
    • 기간 : 미공개

3.1.2. 프리미엄 파트너


[image]
''' PSG PREMIUM PARTNERS'''
'''QTA'''
'''Qatar Airways'''
'''QNB'''
'''VISIT RWANDA'''
[image]
[image]
[image]
[image]
'''Renault'''
'''deliveroo'''
'''ooredoo'''
'''Orange'''

[image]
[image]

'''BEIN Sports'''
'''NIVEA Men'''
'''EA Sports'''
'''SUPERCELL'''
[image]



  • QNB(카타르 국립은행)
    • 금액 : 연 1,500만 유로
    • 기간 : 미공개
셔츠 소매 마킹.
  • QTA(카타르 관광청)
    • 금액 : 연 500만 ~ 1,000만 유로
    • 기간 : 미공개
  • ooredoo
    • 금액 : 연 1,000만 유로
    • 기간 : 미공개
카타르 도하에 본사가 위치한 국제통신사. PSG의 훈련시설 캄프 데 로주 명명권 계약. 캄프 데 로주의 공식 명칭은 계약기간동안 'ooredoo 트레이닝 센터'로 표기된다.
선수단 공식 훈련 저지, 파르크 데 프랭스 LED 전광판 일부.
구단 전용 차량 등 제공.
  • Qatar Airways(카타르 항공)
    • 금액 : 연 500만 ~ 1,000만 유로
    • 기간 : ~2022년
구단 전용 항공기 등 제공.
  • deliveroo
    • 금액 : 연 400만 유로
    • 기간 : ~2022년

3.1.3. 오피셜 파트너


[image]
''' PSG OFFICIAL PARTNERS'''
'''Coca-Cola'''
'''MSC Cruise'''
'''McDonald's'''
'''UNIBET'''
'''Hisense'''
[image]
[image]
[image]
[image]
[image]
'''HUBSIDE'''
'''SOCIOS.com'''
'''GAUSSiN'''
'''Boursorama Banque'''
'''REPLAY'''
[image]
[image]
[image]
[image]
[image]

3.1.4. 오피셜 서플라이어스



3.1.5. 지역 파트너



3.2. 역대 스폰서


[image]
'''파리 생제르맹 FC 역대 스폰서'''
[ 펼치기 · 접기 ]
'''파리 생제르맹 FC 역대 스폰서'''
'''기간'''
'''메인 스폰서'''
'''키트 스폰서'''
'''부분 스폰서'''
1970~1972
-
'''르꼬끄 스포르티브'''
-
1972~1973
'''몬트리올'''[42]
-
1973~1974
'''캐나다 드라이'''
-
1974~1975
'''RTL'''
-
1975~1976
'''코파'''[43]
-
1976~1977
'''르꼬끄 스포르티브'''
-
1977~1978
'''포니'''
-
1978~1986
'''르꼬끄 스포르티브'''
-
1986~1988
'''RTL'''
'''CANAL+'''
'''아디다스'''
-
1988~1989
'''라 생크'''[44]
-
1989~1990
'''TDK'''
'''나이키'''[45]
'''아디다스'''[46]
1990~1991
'''알랭 아플루'''[47]
'''아디다스'''[48] / '''RTL'''[49]
1991~1992
'''코모도어'''
'''뮐러'''[50]
1992~1993
'''튀르텔'''[51]
1993~1994
1994~1995
'''세아트'''
'''아디다스'''[52] / '''RTL'''[53] / '''립토닉'''[54]
1995~2002
'''오펠'''
'''아디다스'''[55] / '''RTL'''[56], '''exity'''[57] / '''SFP'''[58]
2002~2006
'''톰슨 멀티미디어'''[59]
'''아디다스'''[60] / '''SFP'''[61] / '''보이뉴 텔레콤'''[62]
2006~2010
'''에미레이트 항공'''
'''SFP'''[63] / '''Caisse D'Epargne'''[64]
2011-12
'''PMU'''[65]
2012-13
'''PMU'''[66]
2013-14
'''PMU'''[67] / '''CAF'''[68]
2014-15
'''PMU'''[69] / '''CAF'''[70]
2015-16
'''PMU'''[71]
2016-17
'''PMU'''[72]
2017-18
'''PMU'''[73]
2018-19
'''나이키''' / '''조던'''[74]
'''PMU'''[75]
2019-20
'''Accor Live Limitless'''
-
2020-21
-

'''※ 주의''' 기기 환경에 따라 펼칠 시 상당히 길 수 있습니다.
메인 스폰서와 키트 스폰서가 중심이긴 하지만 프랑스 구단 특성상 한 유니폼에 두 개 이상의 스폰서를 받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또한 대회별/경기별로 따로 스폰서를 받는 일 또한 일반적인데 PSG 역시 예외가 아니다.

4. 선수단



2011-12 시즌부터의 각 시즌별 스쿼드는 시즌 개별 문서 참조.

4.1. 주요 출신 선수


꽤 유명한 선수들이 많이 거쳐간 팀으로 1980년대에는 사페트 수시치, 도미니크 로슈토, 조엘 바츠, 루이 페르난데스 등이, 1990년대에는 다비 지놀라, 조지 웨아, 베르나르 라마, 앙투완 콩부아레, 폴 르갱 등이 활약했다. 이후 첼시 FC, 리버풀 FC, 아스날 FC, 레알 마드리드를 거친 희대의 저니맨 니콜라 아넬카가 뛰었으며,[30] 호나우지뉴도 이 클럽에서 뛰면서 2002 월드컵 활약을 바탕으로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했다.[31][32]
첼시 FC레알 마드리드의 원조 마지우개 클로드 마켈렐레도 말년을 이 곳에서 보냈으며, 그 외에도 포르투갈 출신 스트라이커 파울레타,[33] 아르헨티나의 수비수 가브리엘 에인세, 나이지리아의 플레이 메이커 제이제이 오코차 등이 있다.
토트넘 홋스퍼 FC의 감독 마우리시오 포체티노아스날 FC의 감독 미켈 아르테타도 동시에 활약했는데, 덕분에 둘은 각별한 사이라고 한다.
2013년에는 은퇴를 앞둔 데이비드 베컴이 한 시즌 동안 팀에서 뛰기도 했다. 2012년에 AC밀란에서 뛰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 프랑스 리그에 등장해 PSG를 리그 초강팀으로 만들고 불과 4 시즌 만에 PSG 역대 최고의 전설 중 하나가 되어 잉글랜드 무대로 떠났다.
2020년에는 2012년 입단 후 8년 동안 주장으로서 팀을 이끌며 21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린 치아구 시우바와 즐라탄의 구단 역대 최다골 기록을 뛰어넘은 에딘손 카바니가 레전드가 되어 팀을 떠나게 되었다.
2020년 현재 파리 생제르맹의 대표적인 선수들로는 네이마르, 마르코 베라티, 마르퀴뇨스, 케일로르 나바스, 앙헬 디 마리아, 킬리안 음바페, 마우로 이카르디 등등을 꼽을 수 있다.

5. 홈구장 : 파르크 데 프랭스


[image]

왼쪽 경기장이 홈 구장인 파르크 데 프랭스. (오른쪽 경기장은 스타드 장부앵으로 현재 파리 생제르맹 FC 페미닌과 럭비 팀인 스타드 프랑세의 홈 구장)
1974년부터 47,929명을 수용 가능한 파르크 데 프랭스를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1897년 7월 18일 준공, 1932년, 1972년, 2012년 ~ 2016년까지 여러번에 걸쳐 시설이 개선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파르크 데 프랭스 항목 참조.
파르크 데 프랭스에서 PSG의 홈경기가 있는 날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응원문구는 '''Ici c'est Paris'''(이곳이 파리다).

6. 응원가 : Allez Paris Saint-Germain




파리 생제르맹 FC의 응원가.
제목은 'Allez Paris Saint-Germain'(알레 파리 생제르맹)이며, 빌리지 피플의 유명곡 Go West를 팬들의 뜻에 따라 편곡하여 만든 것이다.

7. 역대 성적


[image]
'''파리 생제르맹 FC 역대 성적'''
'''시즌'''




'''유럽대항전'''
'''기타'''
'''감독'''
1970-71
-
64강
-
-
-

'''Ligue 2(1)'''
피에르 펠리퐁
1971-72
16위[34]
64강
-
-
-
-
1972-73
-
-
-
-
-
샹피오나 나시오날 2위[35]
로베르 비코
1973-74
-
8강
-
-
-
리그 2 2위[36]
쥐스트 퐁텐
1974-75
15위
4강
-
-
-
-
1975-76
14위
4강
-
-
-
-
1976-77
9위
16강
-
-
-
-
베리보르 바소비치
피에르 알롱소
1977-78
11위
32강
-
-
-
-
장미셸 라르크
1978-79
13위
32강
-
-
-
-
베리보르 바소비치
피에르 알롱소
1979-80
7위
32강
-
-
-
-
조르주 페로셰
1980-81
5위
32강
-
-
-
-
1981-82
7위

'''1'''
-
-
-
-
1982-83
3위

'''2'''
-
-
UEFA 컵 위너스컵 8강
-
1983-84
4위
64강
-
-
UEFA 컵 위너스컵 16강
-
루시앙 레주크
1984-85
13위
준우승
-
-
UEFA 컵 위너스컵 32강
-
조르주 페로셰
크리스티안 코스트
1985-86

'''1'''
4강
-
-
-
-
제라르 울리에
1986-87
7위
32강
-
-
UCL 2차 조별예선
-
1987-88
15위
32강
-
-
-
-
제라르 울리에
에릭 망베르트
1988-89
준우승
16강
-
-
-
-
토미슬라프 이비치
1989-90
5위
64강
-
-
UC(UEL) 2회전
-
1990-91
9위
16강
-
-
-
-
앙리 미셸
1991-92
3위
32강
-
-
-
-
아르투르 조르즈
1992-93
준우승

'''3'''
-
-
UC(UEL) 4강
-
1993-94

'''2'''
8강
-
-
UEFA 컵 위너스컵 4강
-
1994-95
3위

'''4'''

'''1'''
-
UCL 4강
-
루이스 페르난데스
1995-96
2위
16강
32강

'''1'''

'''UEFA Cup Winners' Cup(1)'''
-
UEFA 슈퍼컵 준우승
1996-97
2위
16강
32강
-
UEFA 컵 위너스 컵 준우승
-
히카르두 고메스
1997-98
8위

'''5'''

'''2'''
-
UCL 조별예선
-
1998-99
9위
32강
8강

'''2'''
UEFA 컵 위너스컵 1회전
-
알랭 지레스
아르투르 조르즈
1999-00
준우승
16강
준우승
-
-
-
필리프 베르지로
2000-01
9위
32강
32강
-
UCL 2차 조별예선
-
루이스 페르난데스
2001-02
4위
8강
4강
-

'''UEFA Intertoto Cup(1)'''
-
UC(UEL) 3회전
2002-03[37]
11위
준우승
32강
-
UC(UEL) 3회전
-
2003-04
준우승

'''6'''
32강
-
-
-
바히드 할릴호지치
2004-05
9위
16강
16강
준우승
UCL 조별예선
-
2005-06
9위

'''7'''
16강
-
-
-
롤랑 파우니어
가이 라콩브
2006-07
15위
8강
16강
준우승
UC(UEL) 16강
-
2007-08
16위
준우승

'''3'''
-
-
-
폴 르갱
2008-09
6위
16강
4강
-
UC(UEL) 8강
-
2009-10
13위

'''8'''
16강
-
-
-
앙투안 콩부아레
2010-11
4위
준우승
4강
준우승
UEL 16강
-
2011-12
준우승
8강
16강
-
UEL 조별리그
-
카를로 안첼로티
2012-13

'''3'''
8강
8강
-
UCL 8강
-
2013-14

'''4'''
32강

'''4'''

'''3'''
UCL 8강
-
로랑 블랑
2014-15

'''5'''

'''9'''

'''5'''

'''4'''
UCL 8강
-
2015-16

'''6'''

'''10'''

'''6'''

'''5'''
UCL 8강
-
2016-17
준우승

'''11'''

'''7'''

'''6'''
UCL 16강
-
우나이 에메리
2017-18

'''7'''

'''12'''

'''8'''

'''7'''
UCL 16강
-
2018-19

'''8'''
준우승
8강

'''8'''
UCL 16강
-
토마스 투헬
2019-20

'''9'''

'''13'''

'''9'''

'''9'''
UCL 준우승
-
2020-21


'''(대회 잠정 폐지)'''

'''10'''

-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8. 역대 감독 및 통계





'''※ 주의:''' 기기 환경에 따라 펼칠 시 상당히 길 수 있습니다.

9. 역대 엠블럼



창단 당시의 엠블럼은 빨강/파랑의 배색 말고는 지금의 엠블럼과 많이 달랐다. 파리의 2가지 상징인 공(파랑)과 그 가운데 그려진 선박(빨강)이 있는 디자인이었는데, 1970년 창단 이후 2년간 사용된 이 엠블럼은, 1972년에 파리 FC와 파리 생제르맹 FC로 클럽이 분리되면서 폐기되었다.
지금 디자인의 시초는 1974년부터 1978년까지 PSG의 회장이었던 패션 디자이너 다니엘 에스떼의 2번째 버전. 다니엘 에스떼가 당시 유니폼과 엠블럼을 디자인했는데, 그때의 디자인이 현재의 엠블럼까지 남아있다.
90년대 파리의 구단주였던 카날 플뤼스(CANAL+)가 1992-93 시즌에 전통적인 파리의 엠블럼 형식을 버리고 완전히 새롭게 엠블럼을 변경했는데, 'PSG'라는 대문짝만한 글자 밑에 'PARIS SAINT-GERMAIN'이 적힌 디자인이었다. 당시 서포터들의 반응은 매우 차가웠고, 카날 플뤼스의 엠블럼은 1995-96 시즌에 폐기되었다.
현재의 엠블럼은 8번째 버전으로 2013년에 디자인 되었는데, 기존보다 더 밝은 파란색을 바탕으로 중앙 부분에는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이 여전히 붉은 색으로 그려져있다. 지금 사용되는 이 버전에서는 이전 버전까지 있었던 에펠탑 아래 루이 14세의 흰색 요람이 없어졌고, 요람 아래 1970이라는 창단 년도 또한 없어졌다.

10. 역대 유니폼


[ 파리 생제르맹 FC 2017-18 시즌 유니폼 킷 ]
'''파리 생제르맹 FC 2017-18 시즌 유니폼 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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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AWAY'''
'''THIRD'''
'''GK HOME'''
'''GK AWAY'''
'''메인 스폰서'''
'''유니폼 메이커'''




[ 파리 생제르맹 FC 2018-19 시즌 유니폼 킷 ]
'''파리 생제르맹 FC 2018-19 시즌 유니폼 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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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image]
'''Domestic HOME'''
'''Domestic AWAY'''
'''Europe HOME'''
'''Europe AWAY'''
'''GK'''
'''메인 스폰서'''
'''유니폼 메이커'''



'''파리 생제르맹 FC 2018-19 시즌 부착 패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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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8 리그 1 챔피언'''


[ 파리 생제르맹 FC 2019-20 시즌 유니폼 킷 ]
'''파리 생제르맹 FC 2019-20 시즌 유니폼 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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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HOME'''
'''AWAY'''
'''THIRD'''
'''FOURTH'''
'''GK'''
'''메인 스폰서'''
'''유니폼 메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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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생제르맹 FC 2019-20 시즌 부착 패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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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9 리그 1 챔피언'''


[ 파리 생제르맹 FC 2020-21 시즌 유니폼 킷 ]
'''파리 생제르맹 FC 2020-21 시즌 유니폼 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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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AWAY'''
'''THIRD'''
'''GK'''
'''메인 스폰서'''
'''유니폼 메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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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생제르맹 FC 2020-21 시즌 부착 패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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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0 리그 1 챔피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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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라이벌리



11.1. 르 클라시크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와 이를 가는 라이벌 관계이다. PSG와 마르세유의 경기는 프랑스 최고, 최대 매치로서 르 클라시크라고 불린다. 원래부터 PSG와 마르세유 서포터들이 상당히 난동을 잘 부리는 것으로 유명하긴 하지만, 특히나 르 클라시크 시기에는 두 서포터 집단이 그야말로 광기를 발산했던 걸로 유명했다.
일례로 양 팀 서포터즈의 충돌로 인하여 PSG팬이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지자, 르 클라시크 때는 아예 원정 서포터즈를 경기장에 출입시키는 게 금지되어 버린 사건이 있었다고 할 정도. 거기에 당시에는 마르세유 원정 팬들은 파리 홈 구장인 파르크 데 프랭스에 반대로 파리 원정 팬들은 마르세유 홈 구장인 스타드 벨로드롬에 들어가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고도 전해진다.'''
현대에 들어 이러한 관련 사건 사고가 비교적 많이 줄어들었지만 해당 두 클럽의 라이벌 관계는 여전하다.

11.2. 파리 더비?


PSG가 연고지로 삼고 있는 파리는 매우 전통 있는 도시인만큼, 프랑스의 스포츠 사(史) 내에서 차지하는 지분도 상당해서, 프랑스 당국이 스포츠를 장려하기 시작한 1800년대 후반부터 비단 축구 뿐만이 아닌 여러 스포츠 구단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었다. 그 중에서도 라싱 클뢰브 드 프랑스는 19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파리 뿐만이 아니라 프랑스에서 최대 규모를 가진 스포츠 단체였고, PSG와의 라이벌리는 어찌 보면 필연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1984-85 시즌부터는 리그 1에서 라싱과 PSG 간의 라이벌 관계가 구축되었고, 파리 더비가 성사되어 1989-90 시즌까지 이루어졌으나, 라싱은 그 이후로 매우 쇠락하여 현재 5부 리그(...)에서 활동 중이기 때문에, 라싱 내에서 상당한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라싱과의 파리 더비를 다시 볼 수 있을 가능성은 거의 절망적인 수준이다.
사실 PSG와의 파리 더비가 최초로 성사된 팀은 라싱이 아니라 레드 스타 FC이다. 현재는 3부 리그까지 떨어졌을 정도로 한 물 간 팀이긴 하지만, 위의 라싱과 리그 1 1934-35 시즌부터 최초의 파리 더비를 선보이기도 했다. PSG와는 리그 1 1971-72 시즌, 리그 2 1973-74 시즌, 리그 1 1974-75 시즌에 3년 동안 파리 더비가 이루어졌다.[38]
앞으로 파리 더비가 다시금 성사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파리를 연고지로 하는 축구 클럽 중 리그 2에서 뛰고 있는 파리 FC와의 더비가 그나마 가능성이 가장 높다. 실제로 파리 FC는 불과 1년뿐이긴 하지만 1978-79 시즌에 리그 1에서 PSG와 같이 뛴 적이 있다. 파리 FC는 실제로도 리그 2에서의 실력도 나름 상위권에 속해서, 2018-19 시즌에는 승격될 '''뻔''' 했다. 비록 승격에 실패하긴 했지만, 이후에도 좋은 성적을 거둬 리그 1으로 승격될 시 1990년 이후로 명맥이 끊긴 파리 더비를 다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만약 이 팀과 PSG와의 파리 더비가 성사될 경우, 위의 역사 문단에 서술한 이유로 인해 두 팀의 팬덤 간의 사이가 매우 좋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12. 여담


  •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마르세유 유니폼을 입고 파리 시내를 활보하면 봉변을 당할 수도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
  • 프랑스는 이탈리아나 독일보다는 좀 더 다인종적인 국가로 유명하고 극우 성향 인물들이 활개치는 경우도 적은 편이긴 하지만 어쨌든 극우 순혈주의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서포터 규모가 상당한 파리 생제르망 역시[39] 극우 성향 서포터들 수가 적지 않은데 SS 라치오와 비견될 정도. 2006년에는 이스라엘 축구 클럽인 하포엘 텔아비브와의 경기 도중 파리 생제르망의 어느 극우 서포터가 하포엘의 유대인 원정 서포터에게 인종차별적인 욕설을 하고 폭력을 휘두르려다 흑인 경찰이 쏜 총에 맞고 죽는 사건(그 경관은 정당방위 무죄)이 있었으며, 극우와는 관련이 없는 사건이긴 하지만 2008년에는 RC 랑스와의 리그 컵 경기 도중 어느 서포터가 랑스가 위치한 북부 지역을 비하하는 현수막을 내걸었다가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까지 나서서 서포터즈의 해산을 명령하기도 했다.

  • 그런데 우습게도 극우 서포터들이 많은 구단으로 유명한 파리 생제르망이 극우 종자들에게는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이슬람 계열의 카타르 자본에게 팔렸기에 라이벌이며 반면 극좌 계열에 가까운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서포터들에겐 비웃음 을 받고 있다.[40] 파리 생제르망 서포터들도 참으로 난감해하기도 하지만, 극우고 뭐고 팀이 그런 구단주 덕분에 프랑스엔 적수가 없는 강호로 발돋움한 것에 좋아하는 팬들이 많다.
  • 권영길 민노당 전 대표가 이 팀의 팬으로 서울신문 파리 특파원으로 있었을 때 종종 경기를 봤다고 한다.
  • 김태륭 해설위원이 과거 이 팀의 유스 출신이었다.[41] 덕분에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차두리처럼 찰진 불어로 선수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파리 유스출신이지만 PSG경기를 중계할 때는 장지현 해설위원처럼 오히려 PSG를 까는 경우가 많았다.
  • 현지에서 파리 생제르'맹'이 아닌 생제르'망'이라고 발음한다는 포포투 홍재민 편집장의 제보가 있었다. 그래서 문서 제목 수정 의견이 있었으나, 문서 제목은 현지 발음이 아닌 한국어의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ain 발음을 '앵'으로 발음하는 것은 과거 윗세대의 프랑스어 발음이고 현대에는 '앙'으로 발음하므로 현재의 발음에 가깝게 표기한다면 '빠히 쌍제흐망'에 가깝다.
  • 2018년 2월 26일에 열린 르 클라시크에서 거대한 드래곤볼의 손오공 프린트가 등장했다. 드래곤볼 7개를 모으면 소원이 이루어지듯이, 마르세유를 이기고 파리의 7번째 우승을 기원하는 의미라고 한다. 응원이 효과가 있었는지 실제로 경기에서 이기고 7번째 우승을 차지했지만, 팀의 핵심 선수인 네이마르가 해당 경기에서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 브롤스타즈는 축구 테마 업데이트로 재키(브롤스타즈)브롤러와 가젯을 추가하고, PSG 티셔츠를 입은 쉘리 스킨을 발매했다. 그 외에도 코치 마이크,마스코트 대릴 스킨을 출시했다.
  • 2019-20 시즌 코로나 19 바이러스 확산에도 불구하고 파리생제르맹이 UEFA 챔피언스리그 4강전에서 RB 라이프치히에 압승을 거두자 수천명의 서포터들이 거리로 나와 기쁨을 만끽했다. 파리 행정당국은 놀라서 결승전 시간에 맞춰 시내 주요시설을 걸어잠그고 경찰과 소방관 3300명을 대기시켰지만 바이에른 뮌헨에 석패하여 준우승에 그치자 팬들의 소요사태를 막지 못했다.

13. 둘러보기



[1] /​paʁi sɛ̃ ʒɛʁmɛ̃/. 프랑스어에서 자음 앞(m,n,h는 제외) 또는 어말에 오는 aim,ain은 /ɛ̃/'앵'으로 발음된다. 외래어 표기 규정에 따르면, 인명, 지명에서는 줄표(-)를 무시하고 상표명에서는 살린다. 단, 줄표의 앞뒤를 별개의 단어로 보아 띄어 쓰지는 않되, 연음 등은 고려하지 않고 표기한다.[2] 단, 이 1970년은 파리 FC와 스타드 생제르맹이 병합된 시점이고 파리 FC는 1969년에, 스타드 생제르맹은 1904년에 창단하였다.[3] 최대 47,929명을 수용할 수 있지만 럭비경기를 할 때는 47,528명, 축구 경기를 할 때는 45,500 ~ 47,929명을 수용할 수 있다. 최대 수용 기록은 1983년 UEFA 컵 위너스컵 8강의 49,575명.[4]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한국 v. 벨기에 경기가 열렸던 구장이다.[5] 전 카타르 아미르(국왕)인 하마드 빈 할리파 알사니의 넷째 아들로, 젊을 때 프로 테니스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2013년 6월 25일 카타르의 아미르로 전격 등극했다. 카타르의 국영 투자청(QSI)을 통해 PSG를 인수하였다. 흔히 파리 생제르맹의 회장인 나세르 알 켈라이피를 구단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PSG에서 켈라이피의 위치는 맨체스터 시티칼둔 알 무바라크 회장과 비슷하다.[6] 리그 371경기[7] 기본 40m + 보너스 17m.[8] 마르세유는 1992-93 시즌의 UEFA 챔피언스 리그, PSG는 1995-96 시즌의 UEFA 컵 위너스컵.[9] 소규모 구단들의 연합체로 시작된 AS 로마의 창단 형태와 비슷하다.[10] 프랑스의 유명 위성 방송 채널.[11] 2020년을 기준으로 라 리가의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분데스리가의 뮌헨, 세리에의 유벤투스처럼 축구계에서 가히 압도적인 영향력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 다만 AT 마드리드, 도르트문트, 라이프치히, 인테르와 같은 대항마들이 견제하는 세 리그와 다르게 프랑스 자국 리그에선 독보적인 강함을 과시하고 있다. 특히 리그앙엔 역사적으로 간간히 우승 기록을 남겼던 과거 랑스와 릴, 자국 명문으로 불리는 마르세유, 리옹, 모나코, 보르도의 경우 현 PSG에게는 부담을 줄만한 팀이 전혀 아니라는 점.[12] 이러한 리그 특성이 리그앙의 가장 큰 단점으로 꼽힌다. 특히 파리 생제르망과 매우 비슷한 위치와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바이에른 뮌헨의 분데스리가와 유벤투스의 세리에를 볼때 각각 도르트문트, 라이프치히, 레버쿠젠, 인테르, 로마, 최근 AC 밀란 등 대항마 및 유럽 무대(챔피언스리그, 유로파리그) 에서 꾸준히 성과를 보여주는 팀들이 존재한다. 허나 리그앙의 경우 파리를 제외하고 유럽 무대에서 꾸준히 결과를 내는 팀이 '''사실상 없다.''' 이는 파리 생제르망의 경쟁력에도 도움이 되지 않고 무엇보다 리그앙의 리그 계수 점수에 도움이 전혀 되지 못한다.[13] 클럽 자체는 1882년 창단되었지만 프로축구 부문에 손을 댄 건 1896년.[14] 1978년 프랑스 지방행정 개편이 있기 전이라 레지옹 일드프랑스파리가 아니었다.[15] 2부 리그는 주요대회가 아니라서...[16] 다만 그 시즌 파리의 첫 유러피언 컵에선 체코슬로바키아의 FK 비트코비체에게 패배하면서 1라운드 만에 탈락하고 만다.[17] 1996년 우승, 1997년 준우승.[18] 당시 레알 마드리드가 19위(!), 유벤투스가 2위.[19] 이후 2006년 카날+가 콜로니 캐피털, 버틀러 캐피털 파트너스, 모건 스탠리에 각각 지분을 매각하면서 재정 문제는 겨우 해결했다.[20] 2006-07 시즌엔 15위였다...[21] 카타르는 매장된 석유도 상당하지만 가스 자원으로 벌어들이는 돈이 더 엄청나다.[22] 네임 밸류가 달리는 점 때문에 저평가되는 대표적인 선수로 프랑스 축구 전문가들은 잘레도 프랑스 국대에 충분히 뽑힐 만한 실력이라고 다들 말한다. 실제로 블랑이 프랑스 국가 대표 감독 자리에서 물러나고 새로이 국가 대표 감독으로 선임된 디디에 데샹은 바로 잘레를 국가 대표로 선발했다. 이후에도 바카리 사냐, 마티외 드뷔시와 함께 프랑스 국대 오른쪽 풀백 자리를 놓고 경쟁 중이며, 파리를 떠나 리옹으로 간 14-15 시즌부터는 31살 나이에 폼이 더욱 올라와서 국대 주전으로도 간혹 나왔다. 드뷔시와 사냐가 각각 부상과 폼 저하로 고생하다 보니 더 많은 기회를 받았다.[23] PSG에게 주급이 무슨 상관이냐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사실 PSG는 즐라탄을 제외하고서는 주급을 그리 비싸게 주면서 데리고 있는 선수가 없다. 이적료는 어마어마한 오버 페이였던 하비에르 파스토레조차도 연봉은 세후 470만 유로 정도로 한화로는 67억 원 가량이다. 주급으로 환산하면 1억 4천만 원 정도. 첼시로 이적했어도 이 정도는 받고도 남을 수준의 급여이다. 그런데 파스토레보다 잘할 거라는 기대치 자체가 줄어들어 버린 카카에게 거의 준 4억에 달하는 막대한 주급을 줄 정도로 PSG가 카카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24] 거액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SS 라치오로 이적한 이후, '''사태웅'''이라 불리울 정도의 극도로 이기적인 플레이에 저조한 득점력으로 라치오의 응원 단장이란 비아냥이나 들었으며 인테르로 임대 가서도 전반기에만 잠깐 반짝하고 그대로 후반기를 말아먹은 선수다. QPR 시절 아델 타랍을 생각하면 된다.[25] 주급을 자그마치 한화 2억 5천이나 받으면서 최전방 공격수 포지션에서 뛰는 주제에 2년간 5골도 못 넣은 그야말로 주급 도적.[26] 다른 두 명은 에딘손 카바니, 마렉 함식.[27] 재분할 후 1974년 강등당할 정도의 성적 부진도 운영 소홀이 원인.[28] ## 다만 의류사업은 꽤나 성공하여 지금도 유럽의 중가 브랜드로 남아있다.[29] 하지만 에스떼처럼 축구 관련 비리는 안 저질러서 축구계 완전 퇴출까진 가지 않았다.[30] 아넬카는 본디 PSG 유스 출신이었다. 그러다 아르센 벵거 감독의 눈에 띄어 아스날로 이적했고 아스날에서 활약하다가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뒤, 부진과 적응이 늦는 점으로 인하여 결국 상당한 거액에 PSG로 리턴했다. PSG는 잉글랜드의 리즈처럼 생각 없이 돈 쓰다가 2000년대 중반기 이후 암흑기를 맞이하였는데, 아넬카를 엄청난 헐값에 아스날에 넘기고 엄청나게 비싼 값에 레알 마드리드에서 다시 데려온 것도 이에 한 몫했다.[31] 당시 호나우지뉴는 PSG의 에이스긴 했지만 노는 걸 좋아하는 성격 탓에 당시 PSG 감독과 마찰을 빚었으며, 그러한 불화로 인해 생각보다는 적은 값에 바르셀로나로 가게 되었다. [32] 물론 그 죽돌이 기질은 어디 가지 않아서, 2006년 이후로 폼이 점점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결국 1년간 훈련 불참 및 문란한 사생활 등으로 막장이 되어 버렸고 바르셀로나는 당시 검은 양 사건의 주축으로 지목된 호나우지뉴를 팀 분위기를 저해시킨다는 이유로 2008년 AC 밀란으로 방출시켰다.[33] 즐라탄 이전 PSG 최고의 공격수. 비교적 말년임에도 파리에서 2연속 득점왕을 기록했는데, 05-06 시즌에는 21골을 넣었으며 06-07 시즌에는 15골 밖에 넣지 못했음에도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다. 사실 이 때문에 리그앙은 스트라이커가 살아남기 힘들다느니 박주영이 12골 넣은 것은 리그를 씹어먹는 활약이었다느니 하는 뻘소리가 나온 것. [34] 공식적으론 파리 FC의 기록. 당시 파리 생제르맹 FC는 클럽의 분리 문제로 시즌 중 없는 상태나 마찬가지이면서 샹피오나 나시오날(당시에는 디비시옹3, 프랑스 3부 리그)에 속했다.[35] 파리 FC와 파리 생제르맹 FC의 분리로 인해 3부 리그 소속.[36] 1972-73 시즌 샹피오나 나시오날 준우승으로 승격. 당시 리그 2는 디비시옹 2.[37] 이 시즌부터 디비시옹 1이 리그 1이 되었다.[38] 1972-73 시즌에 매치가 성사되지 못한 이유는 PSG가 위의 역사 문단에 서술한 구단 내 분열로 인해 3부 리그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39] 사실 파리는 외곽 인구를 포함해서 1000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인구 밀도를 보이는 대도시이다. 이를 연고로 하는 1부 리그 유일의 클럽이 서포터 규모가 적다면 그게 이상한 노릇이다.[40] 실제로 비교적 최근에 파리 생제르망 팬들과 릴 올랭피크 팬들 간에 벌어진 집단 싸움질의 이유도 릴 서포터 중 한 명이 파리 생제르망 서포터들에게 '오일 머니로 먹고 사느라 카타르 놈들한테 머리나 굽실대는 멍청이들' 운운하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라... [41] 다만 불미스러운 일로 의혹이 있긴 하다.